사회,문화 | [CAMPUS 108] 불교로 보는 역사 이야기: 미륵과 궁예는 누구인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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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왕지영 작성일20-01-28 19:19 조회7,601회 댓글0건본문
[불교로 보는 역사 이야기]미륵과 궁예는 누구인가?①
민중들의 미륵신앙을 이용해 집권한 궁예
미륵은 석가모니 다음으로 올 부처 이름
난세가 올 때마다 사람들은 미륵을 찾아
궁예는 민중들의 미륵신앙을 이용해 집권
궁예하면 어느 배우가 생각나는가? 아무래도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 역을 맡은 배우 김영철 씨가 아닐까? 지금도 김영철 씨의 카리스마 있는 궁예 연기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걸 보면 훌륭한 연기는 시간이 지나도 계속 사람들 기억 속에 남는 모양입니다.
드라마 속에서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우면서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미륵’임을 선언하지요. ‘미륵’이란 무엇이며 왜 궁예는 미륵이라 자처했을까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미륵(彌勒)이란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에 올 미래의 부처로, 미륵보살이라고도 합니다. 미륵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로 ‘자애롭다’를 의미하는 마이트레야(Maitreya)를 한자로 표기한 데서 유래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생전에 미륵의 출현을 예견하였다고 합니다. 미륵을 다룬 경전인 『미륵하생경』에 따르면 ‘미륵보살은 석가의 제자였지만 석가로부터 다음 세상의 부처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뒤 천상세계인 도솔천으로 올라가 지금은 천상의 사람들을 위해 설법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열반에 든 뒤 56억 7,000만 년이 지나면 미륵보살이 인간세계로 내려와 용화수(龍華樹)라는 나무 밑에서 성불하리라 예언하셨습니다. 부처가 된 미륵은 용화수 아래에서 설법하는데, 272억 명의 중생들이 미륵의 법문을 듣자마자 바로 깨달음을 얻어 해탈한다고 합니다.
9세기 말 통일신라는 진골 귀족들 간 왕권경쟁으로 인해 나라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자 궁예와 견훤이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세우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싸우는 ‘후삼국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석가모니 이후에 미륵이 미래의 부처로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은 초기 불교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삼국시대 때 불교가 전해지면서 미륵은 단순한 부처가 아니라 말세에 나타나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구세주’로 인식되어 민중들은 혼란스러운 세상을 구제해줄 미륵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게 됩니다.
나라가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영웅 또는 신이 나타나 난세를 평정하고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민중들은 지금 세상이 혼란스러운 까닭은 말세이기 때문에 곧 미륵이 나타나 세상을 평정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궁예는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미륵이라고 생각했고, 사람들은 그를 미륵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그래서 궁예는 이러한 미륵 신앙을 이용해 민심을 얻고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고자 자신을 ‘미륵’이라고 칭했습니다. 하지만 궁예는 자신은 미륵이기에 ‘관심법’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 하면서 수없이 많은 신하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급기야 왕비와 자기 자식까지 죽이는 행동을 하여 왕건에 의해 쫓겨나고 맙니다.
<경기도 안성 국사암의 궁예 미륵 석상>
안성에 국사암이라는 절에 가면, 미륵을 조각한 석상이 있는데 안성 사람들은 ‘궁예 미륵’이라고 부릅니다. 비록 궁예가 폭정을 저질러 왕건에게 쫓겨났다곤 하지만, 버림받은 신라의 애꾸 왕자였던 궁예의 비참한 삶을 동정하고 그를 따랐던 사람들 역시 많았던 모양인가 봅니다.
이렇듯, 미륵 신앙은 민중의 염원이 없으면 성립되기 어려운 신앙입니다. 그런데 앞서 설명했듯 궁예와 같이 자신의 폭정을 정당화하거나 사이비 종교를 열기 위해 미륵을 사칭한 이들도 있었지만, 미륵 신앙을 이용해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소망을 담은 이들도, 불의에 저항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이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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