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 ‘호국불교의 얼’ 만해 스님을 따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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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왕지영 작성일19-05-18 02:17 조회4,239회 댓글0건본문
‘호국불교의 얼’ 만해 스님을 따라 걷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대불 문화순례
사단법인 대불 대불련총동문회는 3월 23일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만해의 길을 따라’라는 주제로 제2차 문화순례 프로그램을 개최했다. ‘만해의 길을 따라’라는 주제로 마련된 순례에는 박유진(덕성여대 17) 대불련 중앙회장과 40여명의 대불총동문회 회원이 참가했다. 이들은 호국불교의 화신인 만해 스님의 발길이 닿은 유적을 답사하며 민족 자주정신을 되새겼다.
만해스님의 애국정신을 잊지 않고자 ... “대한독립 만세”
탑골공원팔각정 앞 1919년 3월 1일 만해스님을 포함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제창했다. 대불련 회원들도 이 역사를 되짚기 위해 팔각정 앞에서 모여 쉬운 말로 풀이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또한 당시 일제의 강압에 맞서 우리 대한민국을 지키고자 만세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처럼 “대한독립 만세!”라며 만세 삼창을 외쳤다. 총동문회 백효흠 회장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하신 만해스님의 긍지를 따르겠다”며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역할을 되돌아보고 대불련인과 불교인으로서 언제나 (그의 정신을) 잊지 않을 것을 다짐하겠다”고 했다.
<사진1>탑골공원 팔각정 앞에 모여 만세삼창을 하는 대불련 동문회원 일동
그 뒤 이들은 당시 만해스님 뿐만 아니라 다른 애국열사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기 위해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고초를 당했던 서대문형무소의 시설을 보면서 동문들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환경에서도 독립운동의 정신을 불태운 선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하지만 사실 이 순례의 주제인 만해스님은 마포형무소에서 형을 살았으며 서대문형무소에서는 재판을 받았을 뿐이다. 1963년 마포형무소가 안양교도소로 이전하면서 그곳에 남아있던 사료들이 모두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기에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했다.
<사진2>대불련 동문회와 박유진 중앙회장이 서대문형무소 벽에 걸린 태극기 앞에서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있다.
이후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만해 한용운 스님의 유택인 심우장을 방문했다. 스님은 총독부가 있는 남쪽을 등지고 북향으로 유택을 짓고 총독부를 바라보지 않겠다는 다짐을 표현했다. 참가자들은 만해스님의 고택을 둘러보며 스님의 초상화 앞에서 반배를 했다. 또한, 참가자들은 인당 한 권씩 한양대 불교학생회 동문회에서 편저한 만해 한용운 스님의 에세이집《고난의 칼날에 서라》를 보시받았다.
<사진3>참가자들은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심우정 마당의 소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다.
그 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만해스님을 포함한 10여 명의 독립운동가의 묘비가 있는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을 방문했다. 묘 앞에서 모두 참배를 한 뒤, 박유진 중앙회장과 백효흠 동문회장을 비롯한 몇몇 참가자들은 절을 올리기도 했다. 한편, 만해스님의 묘소는 2012년 10월에 등록문화재 제519호로 문화재청에 등록됐다.
<사진4>망우 독립유공자묘역 산 중턱에 위치한 만해스님의 묘소에서 참가자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근처의 만해기념관을 방문했다. 남한산성과 만해기념관은 만해스님이 일제의 눈을 피해 즐겨 읽었던 금서들과 [님의침묵]과 같이 생넌에 낸 각종 저술, 그의 옥중 투쟁을 보여주는 각종 신문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3월 31까지 열린 <만해 한용운과 3.1운동 특별전>을 통해 대불련 동문들은 3.1일 만해스님의 민족대표 33인으로서의 독립선언부터 옥중투쟁과 같은 역사를 살폈다. 무여 박유진(대불련 회장, 22)은 “만해 한용운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며,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시절에 훌륭한 글과 생각을 표현하셨다는 점에 감탄했다”고 했다.
<사진5> 생전 만해스님의 사진 사진출처=위키피디아
한편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다. 본관은 청주. 호는 만해(萬海)이다. 그는 일본 일본의 신문물을 접한 뒤<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1910)>을 탈고하며 한.일 불교동맹 조약을 분쇄하는 일에 앞장서 한국불교의 왜색화를 막았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1944년 6월 29일에 중풍과 영양실조 등의 합병증으로 병사했다. 또한,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했다.
<사진6> 팔각정 앞에서 단체로 사진촬영을 하는 대불련 동문들.
KBUF 불담기자단 왕지영 기자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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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 윤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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