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인물 | 이윤우 법사 ‘마음연습 하지마라’ 출판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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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불련 작성일20-02-13 12:18 조회3,632회 댓글0건본문
이윤우 법사 ‘마음연습 하지마라’ 출판기념회
한국일보 | 2019년 11월 21일
정태수 기자
19세기 후반, 청나라 말고는 바깥세상과 담을 쌓은 조선에 키도 크고 코도 큰 하얀것들이 무리지어 나타난다. 알아듣도 못할 소리를 하는 그들은 때로는 겁나는 총포로 어르면서 때로는 신기한 물건과 의약품으로 꼬드기면서 교역을 요구한다. 조선은 야무지게 버티고 싸우고(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71년 신미양요) 쇄국의 빗장을 더욱 단단히 걸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한다. 1882년 봄 조선은 유럽국가로는 처음으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듬해 조선은 민영익을 단장으로 하는 보빙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한다. 이 역시 조선이 서구에 보낸 최초의 외교사절단이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나 신미양요 때 조선을 찾아온 배가 떠난 미 본토의 항구, 그리고 민영익 일행이 양반수염 매만지며 도포자락 휘날리며 미국인과 일본인 역관들의 안내를 받아 팔자걸음으로 첫발을 디딘 미 본토가 바로 샌프란시스코였다.
20세기 초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이민이 미주한인이민사의 서막이었다면 그것의 본격적인 막은 주로 하와이에서 미국살이 예행연습을 마친 이들이 하나둘 본토로 옮기면서 시작된다. 그 첫땅 역시 샌프란시스코다. 1950년 여름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속절없이 무너져 존망의 기로에 선 자유대한을 구하기 위해 미군이 급히 출격한 곳도 샌프란시스코다.
뿐이랴. 한국의 대중가요사에서도 샌프란시스코의 의미는 자못 크다. 싸이니 BTS니 소녀시대니 요 몇 년간 한류 한류 난리지만 한국의 대중가요가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끈 선두주자는 아마도 샌프란시스코(작사 손로원/작곡 박시춘/노래 백설희)일 것이다. 한국전 종전 직후에 나온 이 노래는 가사만 다르게(我在.左右/나는 그대 곁에) 번안돼 중국과 세계화교권에서 꽤 유행했다.
종교라고 예외일 리 없다. 19세기 후반 시작된 미국 기독교인들의 선교를 위한 동방기행 출항지도, 1960년대 중반(서경보 스님의 미국유학을 기점으로 볼 경우) 혹은 1970년대 초반(숭산 스님의 전법활동 개시를 기점으로 볼 경우) 시작된 한국불교의 본격적인 미국진출 전초기지 역시 샌프란시스코다. 서경보 스님은 샌프란시스코 조계선원을 열어 미국인들에게 참선을 지도했고 숭산 스님은 버클리를 중심으로 벽안의 제자들을 길러냈다.
한국불교계의 이름있는 재가자들 중에서도 샌프란시스코 등 북가주와 깊은 인연을 맺은 이들이 적지 않다. 5,60년대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으로 불교중흥을 위해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던 이한상 거사는 1969년 미국으로 이주해 SF베이지역에 살면서 사재를 털어 카멜 삼보사를 창건했고, 박성배 전 뉴욕주립대 불교학교수는 1973년 1월 UC버클리 유학생 신분으로 삼보사 개원법회 사회를 보는 등 북가주 한인 불교마을 생성기에 젊고 유능한 일꾼노릇을 했다.
이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법우가 있다. 본보 불교칼럼니스트 이윤우 법사다. 1944년 경남의 오지 거창 출신인 그는 고려대 불교학생회 활동(63~67년)을 하면서 대학생 불교연합회(대불련) 전국대의원 총회 의장(65년)을 지내고 69부터 72년 4월 미국이민 직전까지 대불련의 제2대 간사장을 맡는 등 대불련의 오늘이 있게 한 산파역 중 산파역이었다. 간호사 새신부(문수행 보살) 덕분에 비교적 쉽게 미국이민을 했지만 미국살이 자체가 만만할 리는 없었다. SF베이지역에서 새삶을 시작한 그는 미국행 때 간직했던 유학의 꿈을 시나브로 접었다, 먹고살기 위해 이리 뛰느라 자녀건사 위해 저리 뛰느라. 그래봤자 부처님 손바닥 아니던가. 안그래도 불심 깊은 그였으니, 더군다나 불연 깊은 이한상 거사가 터잡은 북가주로 왔으니...
삼보사 창건부터 깊숙이 간여한 그는 1992년부터 2002년까지 삼보사 신도회장을 하는 한편으로 매달 두차례 가정법회를 열고 학이시습회라는 공부모임을 이끌었다. 근년에는 불교인들의 상조회 성격을 띤 향목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과거 몇 년간 선보였던 샌프란시스코불교방송국의 지도법사를 맡기도 한 그는 본보에 수십년간 삶과 생각->죽비소리 칼럼을 연재하며 부처님법을 전하는 데 앞장섰다. 숫제 팔로알토 자택은 한국에서 오는 스님들과 불교계 인사들의 역원 같은 곳으로 내놓다시피 했다. 아닌 게 그의 집은 서래사란 이름으로 조계종에 등록돼 있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어느덧 백발의 70대 후반이 됐다. 두 아들 다 장성했고 손녀까지 둔 할아버지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꿈꾸는 신사다.
“나는 평생동안 변하지 않은 한 가지 소망을 품고 살았다. 부처님을 외치고 싶다는 그 소망 말이다. 다음 생에는 더 큰 능력자로 태어나 미국이라는 이 큰 나라에서 목이 터지도록 우리 부처님을 외치고 싶다.”
그가 최근에 이런 소망을 담은 책을 냈다. 본보에 쓴 칼럼 등을 모은 책이다. 부처님을 외치고 싶다는 저 소망은 이 책 권두에 실은 ‘저자의 말’에 담겨있다. 그런데 책이름이 얼핏 뜬금없다. 마음공부 신간인데 ‘마음연습 하지마라’? 읽다보면 알게 된다. 그래도 궁금하다면 그가 2002년 7월 초에, 그러니까 한일월드컵이 막 끝난 뒤에 본보에 기고한 같은 이름의 칼럼을 일독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무려 568쪽에 달하는 이 책은 ‘I. 너는 네 세상에 있느냐 II. 사랑을 서로 부르는 메아리 III. 발가락이 닮았다 IV. 욕망이란 이름의 재산 V. 소는 바람을 본다’는 다섯 장으로 돼 있다. 도서출판 ‘답게’에서 펴낸 이 책은 지난달 중순부터 한국에서는 예스24 등 온라인 책방과 교보문서 등 오프라인 서점에서 발매되고 있다.
지난 16일(토) 낮 로스 알토스의 한 음식점에서 ‘마음연습 하지마라’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 법사 부부와 자녀들, 그리고 진월 스님, 광전 스님, 운월 스님과 전 불교방송국 사장 김수덕 거사 등 재가불자 50여명이 함께한 이날 행사에서 이 법사는 “한국일보 요청으로 간간이 쓴 글을 중심으로 문수행 보살이 책을 만들어주었다”고 감사를 표한 뒤 “오래 전부터 잘 아는 분들인데 옛날처럼 만나서 공부하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식지 않은 열정을 거듭 보였다. 진월 스님은 축사를 통해 이윤우 법사를 유마거사에 비유하며 이 법사 같은 분이 더 많이 나오기를, 이런 자리가 더 있기를 소망했다.
<정태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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