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 나무아미타불에서 ‘나무’는 Tree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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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왕지영 작성일19-05-10 11:39 조회10,781회 댓글0건본문
나무아미타불에서 ‘나무’는 Tree야?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의미
신라 원효대사 민중에 전파 위해 만들어
“나무아미타불”이 방송 자막으로 삽입된 사례. <출처=JTBC ‘비정상회담’ 갈무리>“나무아미타불”이 방송 자막으로 삽입된 사례. <출처=JTBC ‘비정상회담’ 갈무리>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매우 익숙한 표현이다. 일례로, 영화 ‘사바하’에서 목사 역을 맡은 배우 이정재가 스님 역할을 맡은 진선규에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말한 장면과 예능 ‘비정상회담’에서 타일러가 해탈한 듯 체념한 표정을 짓자 방송에서 승복 CG를 입히고 자막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삽입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불자가 아닌 이상 나무아미타불이 무슨 뜻인지 물어본다면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무아미타불은 무슨 뜻을 담고 있을까?
‘나무아미타불’ 외기만 하면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이다. ‘나무(南無)’는 인도의 옛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귀의하다’(歸依, 믿고 의지하다), ‘경례하다’를 뜻하는 나마스(namas)의 활용형인 나모(namo)를 한자로 소리를 빌려 적은 것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극락세계인 서방정토에서 설법하시는 부처님의 이름이다. 본래 인도에서는 이 부처님을 ‘아미타바(amitābha, 무량의 광명)’와 ‘아미타유스(amitāyus, 무량의 수명)’라는 두 단어로 표기했지만, 중국으로 불교가 전해지면서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의 ‘아미타(amita)’만 쓰이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뜻을 풀이해보자면 “서방정토에 계시는 아미타 부처님께 예배합니다(의지합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왜 아미타불을 향해 기도를 할까?
<무량수경>에 따르면 아미타불은 전생에 왕이었으나 출가해 법장(法藏)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법장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48가지의 서원(사십팔대원 혹은 사십팔원이라 한다)을 세우고, 이 중 하나라도 이루지 못하면 자신은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여 끝없는 수행 끝에 마침내 부처가 되어 극락세계에 가게 되었다.
아미타불의 사십팔대원은 하나하나 모두 중요하지만 그중에서 중요한 서원을 몇 가지 뽑아보자면 “내가 있는 불국토에 태어나는 이는 금생에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것”과 “모든 중생이 내 이름을 열 번만이라도 염불한다면 반드시 내 불국토에 태어나게 할 것”, “임종 직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자는 반드시 내 불국토에 태어날 것”이 있다. 즉, 정성을 다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기만 하면 반드시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정토에 태어나 깨달음을 이뤄 성불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정토 사상으로 진화하였고, 불교가 대중화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렇다면, 정토 사상과 ‘나무아미타불’이 어떤 과정으로 민중에게 퍼진 걸까?
국보 제27호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출처=문화재청>
공부하지 않아도 극락 갈 수 있어
불교가 대중화되는데 크게 기여해
‘나무아미타불’은 민중들에게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신라의 원효대사(617∼686)가 만든 표현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것은 귀족의 특권이었다. 왜냐하면 불경을 읽기 위해서는 우선 글자를 배워야만 했고, 워낙 불경의 내용이 방대하고 어려워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당대 민중들은 불교를 공부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원효대사는 머리를 기르고 속세의 옷을 입으며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나무아미타불만 외워도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설법했다. 원효대사의 가르침은 가난과 배고픔, 수탈로 고통받던 민중들에게 불경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다음 생에 극락에 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고 불교가 대중화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를 두고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에서는 “저 오두막집의 더벅머리 아이들의 무리[桑樞瓮牖玃猴之輩]로 하여금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하고,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대사의 교화가 실로 크도다.[使桑樞瓮牖玃猴之輩 皆識佛陀之號, 咸作南無之稱, 曉之化大矣哉.]”라고 평할 정도니 말이다.
즉, 원효의 가르침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한 단어로 집약되어 민중들에게 전파되었고, ‘나무아미타불’은 민중들에게 비록 현세가 고통스러울지라도 내세에는 고통이 없는 행복한 세상에 가 평등하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이는 정토사상의 핵심이며 근원이다. 그렇기에 불자들은 지금도 꾸준히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극락세계에 나아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불담기자단 전북 이준호 기자(junholee.0722@gmail.com)
기사 작성에 도움을 주신 분
금강신문 조용주 기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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