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 김동수열사 31주기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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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1-09-20 17:53 조회5,997회 댓글0건본문
일시 : 2555(2011)년 5월 27일(금)
장소 : 광주 조선대학교 내 지광 김동수열사 추모비 앞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대불련 전남지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 시민군으로
계엄군에 맞서다 산화한 지광 김동수열사 제31주기 추모제를 광주 조선대학교 내 지광 김동수열사 추모비 앞에서
봉행하였다.
추모제에는 김동수열사의 부모님과 이인근 대불련 중앙회장을 비롯한 대불련 선후배들과 김동수열사추모사업회 등
광주전남지역 불교계 및 시민사회단체가 참석하여 열사의 정신을 기렸다.
지광 김동수열사 약력
◯1958년 7월 2일 |
◯1973년 3월 |
◯1978년 3월 15일 |
◯1979년 9월 |
◯1980년 4월 |
◯1980년 5월 19일 |
◯1980년 5월 21일 |
◯1980년 5월 27일 |
◯1989년 2월 25일 |
◯현재 |
광주 조선대학교 내, 지광 김동수열사 추모비
<지광 김동수열사 제31주기 추모제 대불련 추모발원문>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다시 오월입니다.
1980년 5월, 그날도 지금처럼 푸르름 가득한 5월이었겠지요. 이 땅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염원하고 온몸으로 지켜내고자 광주 거리곳곳을 가득 메웠던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한 날이 바로 5월 21일, 부처님 오신 날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봉축하고 기뻐해야 할 뜻 깊은 날에 광주는 그렇게 야만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그 오월의 한 가운데 지광 김동수열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온갖 죽임과 야만의 상황을 목도하면서 불살생을 첫 계율로 여겨온 불자의 양심을 저버릴 수 없어 마지막까지
싸우다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서 운명을 달리하였습니다.
김동수열사가 가진 유품은 대불련 뺏지와 단주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자신의 일신과 안위만을 생각했다면 김동수열사는 목포에서 광주로 귀환하지 않았을 것이고, 마지막까지 남아 총칼에
짓이겨진 시신 수습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계엄군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얼마든지 몸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동수열사는 죽음으로써 죽음을 넘어서는 생사불이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김동수열사는 날씨에 따라 요리조리 쉽게 변화하는 삶이 아니라 이 땅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불가의 생명평화
의 사상을 받아 안으며 이를 온몸으로 우직하게 실천해간 진정 아름다운 보살입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5월 광주에는 언제나 비가 내립니다. 이 비가 지광 김동수열사를 비롯해 5월 영령들의 원혼을 달래는 비가 되고, 산자들
의 부끄러움을 참회하는 비가 되며, ‘5월’이 박제화 되고 규격화되고 국가로부터 공인된 지금의 상황이 오히려 5월 정신
에서 멀어져가고 있지는 않은 지 가슴깊이 성찰하게 하는 비가 되기를 발원합니다.
더불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5.18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을 이 시대와 사회 가운데서 어떻게 구현해 낼 것인지에 대한 진지하고도 가슴 저미는 성찰이 이루어지기를 발원합니다.
그동안 광주지역 불교계와 대불련 그리고 청년회 등 뜻있는 불자들을 중심으로 진행해 온 5.18 광주민중항쟁 추모법회
와 지광 김동수열사 추모제를 범불교적으로 봉행하여 이 땅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해간 5월 열사들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는 장으로 새롭게 만들어 지광 김동수 열사의 보살 정신이 모두의 가슴 가운데 꽃 피울 수 있기를 푸르름
가득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사부대중 모두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발원합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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